끈적한 일상/20142014. 1. 15. 21:20


언니, 

내 긴 여행의 소중한 동반자, 행선 언니.

서로가 가진 그늘진 동굴을 보여주어도 그 질곡을 스스럼없이 알아주던, 이미 오래된 벗이었던 언니

언니가 가끔 보내주는 메시지에 언니가 있는 그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


얼마전 언니 메시지를 받으며 긴 여행의 고단함이 글자 사이사이 묻어나오는것만 같아 마음이 찡했어요.

아프리카를 꿈꾸던 열정도 결국 지난 여름을 채 넘기지 못해 허기질대로 허기져서는 이스라엘을 빠져 나온 그 때의 내 마음 같으려나.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은, 새로움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은 여행의 큰 동력을 잃는 것이겠지요

그때부터는 그저 목마른 나그네가 되는 것이니.


하지만 돌아온다 한들  잠시 접어두고 도망쳐나온 그 자리는 여전히 우리를 이방인으로 내몰겠지요.

저 역시 긴 여행 뒤 마주한 현실은 변함이 없었고

변한 것은 오로지 나 자신뿐인 이물감에 여전히 시난고난 앓고있는 중이에

경이와 환희로 한껏 부풀어 있던 나는 점점 작아지고 

거칠어진 손발이 부끄러워지며 배낭하나에 익숙해진 삶은 그저 가난을 숨기기 위해 좋은 타협같아 보여요.

사실 무엇을 찾고 배우려 떠났던 여행은 아니었지만, 여행의 힘은 지혜롭게도 나를 질문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기껏 가슴에 우주의 한조각을 안고 돌아와서는 낙오자에게는 비정하기만 한 줄서기에 다시금 목매달고 

시시껄렁한 티비프로나 보면서 주말을 채우는 식의 인생살이는 이제 더이상 살아갈 수가 없어진 것이죠.


우리의 여정은 육체적 쉼이나 모험심으로 부추겨진 욕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오랜 소원도 아니었잖아요

겉은 같으나 속은 완전히 다른 광야의 시간.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절대자에 의해서건 스스로에 의해서건 우리는 길 위로 내몰렸고

덕분에 진짜 쉼도 알게 되고 모험이 무엇인지 체득하고 꿈을 소망하는 시간을 선물받은 것 같아요

그 선물로 목을 축여가며 길도 없고 의지도 쇠약해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속에서 지금까지 버티며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려 애썼고, 그렇게 살아낸 시간은 싹을 틔울만한 씨앗이 되었을거라 생각해요


얼마전 순례에 관한 책을 읽게 됐는데, 

어느 경우든 일단 노마드의 순례를 경험하고 나면 아무것도 이전과 똑같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어요.

결과보다 여정이 훨씬 중요하고, 길을 가다 거창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해도 우리의 삶에는

진실한 구석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지며, 굳이 성경이 시키지 않아도 유목민은 공중에 새를 볼 줄 알게 된다는 얘기였어요.

우선 나의 여행이 순례와 꼭같아서 위로 받았고 

순례를 통해서 얻어진 유목민적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관이라는 것에서 더 큰 위로를 받았어요

없더라도 손님을 기꺼이 후하게 대접하고, 이웃의 고통에 응답해야 하며, 

소유를 줄이는 것이 당연하고, 안개같은 존재는 안개로서 살아가야 함이 순리인것을.

그러한 삶의 방식을 온몸으로 배우게 하심이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짐이 감사했어요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삶이고 이땅에서 천국을 이뤄가는 방식인 것을 직접 가르쳐주신 것 같아요.

좋은 글을 써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싶은 욕구도 있지만,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고 싶은 욕구로 갈급함을 느껴요.

아직은 서툴지만 우리의 몸부림속에서 단단한 것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요.

언니의 삶이 이땅 위의 작은 천국이 될 것을 믿어요.

여행의 의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껍질이 벗겨지듯 새로와지는 것 같아요.


두려움은 잠깐 내려놓고 갈 수 있을만큼 가보도록해요 언니,

불현듯 참지 못할 정도로 한국이 그리워지면 다 뒤로하고 돌아와도 괜찮구요 (just like me)

언니가 마음에 들어하던 '변두리 인간'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리고 고된 순례후에는 이전과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걱정말고 힘내요!


깊어가는 밤,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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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키 작은 프리데만씨